초계 변씨 가문/두문동 72현

두문동 72현

돌샘 2011. 1. 2. 11:46

두문동(杜門洞) 72현과 초계 변씨 8세 빈(贇) 자(字) 할아버지

 

1. 시작하는 말

 

  내가 중고등학생이였던 무렵 집안 어른들로부터 나의 조상님중에 두문동 72현중 한 분이 계셨는데 배향(配享)을 할때 나의 증조부님이 집사로 참석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상급학교 진학에 전념하던 시기라 무심코 흘려 듣게 되었고 세월이 지나 내가 중년이 되어서 유사한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두문동 72현이 어떤 선현들을 일컫는 말인지는 비교적 싶게 알아 볼 수 있었으나 나의 조상님중에 어느 분이 72현에 해당하시고 성함(諱)이 어떻게 되는지는 쉽게 알 수가 없어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블로그 ‘초계 변씨 집안이야기’에서 초계 변씨 8세 휘(諱) 빈(贇) 자(字) 할아버지가 72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72현에 속한 분들의 명단(諱)이 있는 자료를 여러 가지 찾아 보았으나 빈(贇) 자(字) 할아버지 성함(諱)이 포함된 자료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성함(諱)이 포함된 자료를 찾게 되었을 때 600년이 넘게 지난 옛일기를 대하는 듯 반가웠습니다. 후일 초계 변씨 자손들은 물론이고 72현중 다른 분의 자손일지라도 자료를 찾아 보는데 조그만 도움이 되고자 관련 자료들을 발췌하여 블로그에 올려 놓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두문동 72현의 유래

 

  ‘두문동 72현’으로 불리는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조선후기 영조대(英祖代)에 와서야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비밀리 또는 구전으로 전해오던 고려수절신에 대한 기록도 성리학자와 후손들에 의해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두문동이라 하면 72현으로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으나 이조 헌종 정미년(1847)에 간행한 두문동서원지에 보면 120현이라 하였는데 개성부 종봉산 아래 동두문동 48현이 있고, 개성부 만수산 아래 서두문동 72현이 있어서 합봉 120현이라 하였다. 세상에는 서두문동 72현이 元운곡 소장 서첩에서 먼저 발견되어 소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이성계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자 고려의 조신들은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개풍군지(開豊郡誌)에 따르면 두문동(杜門洞)은 본래 북녘 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개성 송악산 서쪽 자락 만수산과 동쪽 보봉산(寶鳳山)에 각각 두 곳의 두문동이 있었다. 만수산의 西두문동에는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은둔했고, 보봉산(寶鳳山)의 東두문동에는 무신(武臣) 48인이 숨어 살며, 고려에 충성을 다짐하고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였다. 이성계가 왕사(王使)를 보내서 마음을 돌리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화가 난 이성계가 왕명으로 동, 서 두문동을 에워싸고 섶을 쌓은 다음 불을 지르며, ‘너희 중에 백이, 숙제와 같은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보자’하였으나 西두문동에 있던 고려의 문신(文臣) 72인과 東두문동에 있던 무신(武臣) 48인은 불길 속에 안좌하여 모두 다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참혹한 화형에 대한 일은 전해질 수가 없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신정(洗身井, 같이 죽기로 맹세하면서 몸을 씻었던 우물)이란 것도, 회맹대(會盟臺, 충성을 맹세하던 장소)란 것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인데 모두 두문동 안에 있었다. 1809년(순조 9년)에 당시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는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다. 고려의 문신(文臣)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이곳으로 들어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충신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성리학의 ‘의리 명분론’이 강화되던 시기인 1751년(영조 27년)에는 고려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杜門洞碑)를 세우게 하였다. 영조(英祖)가 1760년 9월에 후릉(조선 2대 정종과 비 정안 왕후의 능) 참배차 개경(개성) 부근 동남쪽의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었다. 영조가 지명의 연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이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직후에 고려의 유신(儒臣)들이 개경 동남쪽 고개에 올라 출사를 거부하고 이 고개에 조회 때 쓰는 관과 조복을 소나무에 걸어놓고 뿔뿔이 흩어지므로 ‘조회하지 않는 재’라는 뜻으로 부조현(不朝峴)이라고 칭하며, 부조현(不朝峴)을 지나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고 했다. 이에 영조는 그들을 기려 그 해에 부조현비(不朝峴碑)를 세우게 했다.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인 것은 1751년(영조 27년)에 두문동 충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두문동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두문동 72현의 최초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文集)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典故大方)’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충렬록(奎章閣忠烈錄)중 ‘두문동 제선생실기’에 의하면 ‘고려말 충신중 입절사의(立節死義,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고 죽은 사람)한 분들이 많았고 그 나머지는 산거야처(山居野處)하여 두문병적(杜門屛跡)하였거나, 혹은 벼슬을 주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정절을 지킨 분을 통칭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니 대개 그 뜻이 같다고 하여 통칭하였을 뿐이지 반드시 개성 두문동에서 함께 은거하였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조충렬록(麗朝忠烈錄) 발문(跋文)에도 ‘중국으로 들어가 마친 바를 알지 못하고, 먼 땅에 유배되었다가 유환(宥還)되지 못한 분이라도 두문동에서 동은(同隱)한 제현(諸賢)과 같으니 두문동에서 은거한 분이 그 수사 72인에 미만(未滿)하여도 통칭 두문동 선생이라고 지금까지 전한다’라고 하였다. 고려숭의회(高麗崇義會)가 발표한 72현은 무려 3백70여현이고 이미 순절한 충신까지 합하면 4백60여현에 이르고 있다.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와 국명류표방록(勝國名流漂傍錄)은 그 인원을 1백16인과 1백5인으로 각각 기록해 놓았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용어의 ‘72현’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겠다.

 

<두문동 72현 관련 기록연보>

1751년 두문동비

1760년 부조현비

1774년 철감록

1783년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

1809년 두문동실기 간행

1860년 화해사전

1872년 기우집

1923년 여조충렬록 간행

1924년 전고대방 간행

1934년 두문동서원지

1934년 개성에 두문동서원 창건

1935년 경현사지 간행 등이 이루어졌다.

 

3. 두문동 서원과 72현

 

  두문동서원은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에 위치하며 고려말 충신들이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말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두문동 72현 명단(諱)

 

1) 두문동 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殉節班 奉安) : 17분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죽산인(竹山人), 휴암(休菴) 임선미(林先味) 순창인(淳昌人),

원촌(遠村) 조의생(曺義生) 창령인(昌寧人), 용호(龍湖) 맹호성(孟好性) 신창인 (新昌人),

두문자(杜門子) 성사제(成思齊) 창령인(昌寧人),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 창령인(昌寧人),

퇴우당(退憂堂) 신익지(申翼之) 평산인(平山人), 신귀제(愼歸齊) 신이(申彛) 평산인(平山人),

성사(省事) 신우(申瑀) 평산인(平山人),복애(伏崖) 국유(鞠濡) 담양인(潭陽人),

밀직(密直) 고천상(高天祥) 개성인(開城人),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 청송인(靑松人),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하빈인(河濱人), 적암(積巖) 서중보(徐仲輔) 장성인(長城人),

직랑(直郞) 신순(申珣) 평산인(平山人), 온수감(溫水監) 신기(申淇) 평산인(平山人),

태학생(太學生) 현계생(玄繼生) 의창인(義昌人)

2) 두문동 표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抗節班 奉安) : 31분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 경주인(慶州人),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 여주인(驪州人),

어은(漁隱) 이치(李致) 합천인(陜川人), 뇌은( 隱) 전귀생(田貴生) 담양인(潭陽人),

해은(海隱) 이유(李裕) 옹진인(甕津人), 송은(松隱) 구홍(具鴻) 능성인(陵城人),

앙천제(仰天齊) 곽추(郭樞) 청주인(淸州人), 송촌(松村) 송인(宋寅) 남양인(南陽人),

도총제(都摠制) 고천우(高天祐) 개성인(開城人), 채미헌(採薇軒) 김오륜(金五倫) 정선인(旌善人),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 인천인(仁川人), 전서(典書) 박침(朴枕) 밀양인(密陽人),

천은(川隱) 이맹예(李孟藝) 옹진인(甕津人), 모려당(慕麗堂) 변숙(邊肅) 원주인(原州人),

고죽제(孤竹齊) 조안경(趙安卿) 함안인(咸安人), 신답(新沓) 서보(徐輔) 이천인(利川人),

해은(海隱) 박심(朴諶) 면천인(沔川人), 법촌(法村) 박령(朴寧) 면천인(沔川人),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 랑야인(琅耶 人), 황의옹(黃衣翁) 신안(申晏) 평산인(平山人),

양촌(陽村) 원선(元宣) 원주인(原州人),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함안인(咸安人),

집현전랑(集賢殿郞) 신감(申鑒) 평산인(平山人), 미산(眉山) 성단(成단) 창령인(昌寧人),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광산인(光山人), 직제학(直提學) 조유도(曺由道) 창령인(昌寧人),

쌍회당(雙檜堂) 도동명(陶東明) 순천인(順天人), 감무(監務) 임탁(林卓) 라주인(羅州人),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 공주인(公州人), 모은(茅隱) 이오(李午) 재령인(載寧人),

존암(尊庵) 이수생(李遂生) 수안인(遂安人)

3) 두문동 표절실 정절반 봉안 (杜門洞 表節室 靖節伴 奉安) : 7분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흥해인(興海人), 문하평리(門下評理) 변빈(卞斌) 초계인(草溪人),

밀직(密直) 이성인(李性仁) 안성인(安城人), 영호군(領護軍) 채옥택(蔡玉澤) 평강인(平康人),

충제(忠齊) 최문한(崔文漢) 강릉인(江陵人), 한림(翰林) 이탕휴(李湯休) 영천인(寧川人),

현령(縣令) 허징(許徵) 양천인(陽川人)

4) 두문동 순절실 순절반 봉안 (杜門洞 殉節室 殉節班 奉安) : 11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일인(迎日人),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성주인(星州人),

인제(麟齊) 이종학(李種學) 한산인(韓山人), 이유헌(理猷軒) 신득청(申得淸) 평산인(平山人),

초옥자(草屋子) 김진양(金震陽) 계림인(鷄林人),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경주인(慶州人),

부사(府事) 손등(孫登) 밀양인(密陽人), 헌납(獻納) 하경(河敬) 진양인(晉陽人),

경제(敬齊) 홍로(洪魯) 부계인(缶溪人),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 정선인(旌善人),

운암(雲巖) 차원부(車原부) 연안인(延安人)

5) 두문동 항절실 항절반 봉안 (杜門洞 抗節室 抗節班 奉安) : 33분

목은(牧隱) 이색(李穡) 한산인(韓山人), 손암(遜菴) 최윤덕(崔允德) 탐진인(耽津人),

석계(石溪) 최첨노(崔添老) 경주인(慶州人),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 성주인(星州人),

고산(孤山) 공은(孔隱) 곡부인(曲阜人),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중인(李中仁) 용인인(龍仁人),

조은(釣隱) 이옹(李邕) 아산인(牙山人), 병제(丙齊) 남을진(南乙珍) 의령인(宜寧人),

송은(松隱) 장안세(張安世) 인동인(仁同人),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 신창인(新昌人),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 전주인(全州人), 회곡(檜谷) 최호(崔瑚) 평양인(平壤人),

두노(杜老) 최유강(崔有江) 경주인(慶州人), 도총제(都摠制) 박덕공(朴德公) 죽산인(竹山人),

금은(琴隱) 조열(趙悅) 함안인(咸安人),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남평인(南平人),

오은(梧隱) 김사렴(金士廉) 안동인(安東人), 퇴제(退齊) 신우(申祐) 아주인(鵝州人),

좌윤(左尹) 손호정(孫孝貞) 밀양인(密陽人), 절제사(節制使) 이옥(李沃) 양성인(陽城人),

동강(東岡) 이린(李璘) 원주인(原州人), 송은(松隱) 박천익(朴天翊) 밀양인(密陽人),

둔옹(遯翁) 최이(崔邇) 경주인(慶州人), 건곡(虔谷) 조유(趙瑜) 옥천인(玉川人 ),

정은(正隱) 옥사온(玉斯溫) 의춘인(宜春人), 호은(湖隱) 허기(許麒) 김해인(金海人),

묵은(默隱) 정희(鄭熙) 하동인(河東人),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 이천인(利川人),

여강(驪江) 윤충보(尹忠輔) 무송인(茂松人), 보승(保勝) 최원(崔原) 수원인(水原人),

호촌(壺村) 신포시(申包翅) 고령인(高靈人),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원주인(原州人),

금은(琴隱 ) 이양소(李陽昭) 순천인(順天人)

6) 두문동 정절실 정절반 봉안(杜門洞 靖節室 靖節班 奉安) : 20분

농암(籠巖) 김주(金澍) 선산인(善山人), 안정백(安定伯) 라천서(羅天瑞) 안정인(安定人),

사암(思菴) 민유(閔愉) 여흥인(驪興人),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담양인(潭陽人),

자포옹(自逋翁) 김전(金鈿) 안동인(安東人), 삼가(三可) 조공(趙珙) 자천인(自川人),

회정(晦亭) 전자수(全子壽) 담양인(潭陽人), 악은(岳隱) 노신(魯愼) 함풍인(咸豊人),

한천자(漢川子) 신아(申雅) 평산인(平山人), 만은(晩隱) 홍재(洪載) 풍산인(豊山人),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고령인(高靈人), 상서(尙書) 이춘계(李春啓) 합천인(陜川人),

상서(尙書) 맹유(孟裕) 신창인(新昌人), 묵제(默齊) 양우(梁祐) 남원인(南原人),

수운암(睡雲菴) 송교(宋郊) 여산인(礪山人), 불강(弗降) 김약(金약) 광산인(光山人),

퇴휴당(退休堂) 선윤지(宣允祉) 보성인(寶城人), 어일(漁逸) 민유의(閔由誼) 여주인(驪州人)

사인(舍人) 이조(李條) 경주인(慶州人), 군사(郡事) 민보문(閔普文) 여주인(驪州人)

7) 서원에 봉안안된 두문동 절신 : 24분

우현보(禹玄寶), 유순(柳洵), 조견(趙견), 허석(許錫), 이수인(李守仁), 길재(吉再), 조홍(趙 洪), 이사경(李思敬), 이행(李行), 이양중(李養中), 김육록(金六鹿), 변귀수(邊貴壽), 안종약 (安宗約), 김준(金俊), 윤육(尹陸), 민보(閔普), 임극(林隙),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 김 위(金瑋), 박의중(朴宜中), 박태시(朴太始), 길인적(吉仁迪), 반(潘)

 

4. 초계 변씨 8세(世) 휘(諱) 빈(贇) 자(字) 할아버지 관련내용

 

  고려말(高麗末) 대호군(大護軍) 휘(諱) 변경(卞卿)의 아들로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이품(正二品)이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에 판서 성만용(判書 成萬庸), 박사 정몽주(博士 鄭夢周), 제학 홍재(提學 洪載), 대사성 이색(大司成 李穡), 전서 김성목(典書 金成牧), 전서 조열(典書 趙悅), 진사 이오(進士 李午), 단구 김후(丹邱 金厚) 등과 때 없이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며 세상을 한탄(恨歎)하고 슬픔을 달래는 시(詩)를 주고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은(殷)나라가 망할 때를 상기하여 서로 말하기를 은(殷)나라에는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왕을 간(諫)하다 죽음을 당하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우리도 각자의 뜻에 따라 처신(處身)하자 하니 다 말하기를 좋다하고, 홍재(洪載)는 삼가(三嘉)로 돌아가고, 김후(金厚)는 상산(商山)으로 갔으며, 조열(趙悅)은 함안(咸安)으로 돌아갔다, 변빈(卞贇)선생은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자정(自靖)하여 고려조(高麗朝)에 충절(忠節)을 지켰다. 고려충신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분으로서 개성(開城)의 두문동서원 표절실정절반 제이위(杜門洞書院 表節室靖節班 第二位)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봉안문(奉安文)

 

  아! 선생이시어 초계(草溪)의 전통있는 집안으로 고려(高麗)에서 평리(評理)를 지내셨으나 황천(皇天)이 돕지 아니하여 나라의 운세(運勢)가 이미 끝났도다. 공(公)의 집에 하루 저녁 친구를 초청하였으니 성씨(成氏), 홍씨(洪氏), 정씨(鄭氏), 이씨(李氏)로다.

  은(殷)나라에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도다. 각자가 뜻에 따라 행동하자 말을 마치고 모임을 파하니 두문(杜門)골이 가히 청결(淸潔)한 곳이라 하고 남쪽 궁궐(宮闕)을 바라보며 통곡하여 슬퍼하고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끝났도다 하였는데 진실로 선생의 망복지의리(罔僕之義理)로다. 옛 마을에 사람은 새로운데 천리(天理)는 어길 수 없어 정절반(靖節班)에 향사(享祀)를 올리고자 맑은 바람 오랜 세월에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바치오니 흠향(歆饗)하옵소서.

 

< 관련문헌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두문동서원지(杜門洞 書院誌) : 색인번호 고2107-80

이조참판공파선적지(吏曹參判公派先蹟誌)

초계,밀양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성구사지(誠久祠誌)

 

5. 맺는 말

  저는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글세대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기록된 원본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한글로 번안된 각종 자료를 찾아 읽은 후, 중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젊은이들도 읽고 이해하기 쉽게 일부 문구를 보완하였습니다. 자료의 내용중 미흡한 부분이 있거나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더 관심이 많은 분들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를 바랍니다. 역사학자들중에는 ‘두문동 72현’과 관련된 내용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바쁜 생활중에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선현들과 조상님의 발자취를 되새겨 봄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