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 변씨 가문/현조행적(顯祖行蹟)

조상님의 발자취

돌샘 2012. 1. 13. 09:41

                           현 조 행 적(顯 祖 行 蹟)                 

나무는 뿌리를 알고 가지를 알면 그 나무에 피는 꽃과 열매의 종류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은 그 조상님이 살아오신 발자취를 살펴보면 그 집안의 가풍(家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집안마다 족보(族譜)가 있어 관심이 있으면 조상님들의 발자취에 관한 편린(片鱗)을 찾아볼 수 있으나

족보에는 많은 족인(族人)들에 관한 사항을 수록해야 하기 때문에 기록내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큰 업적을 남겨 세상에 이름을 떨친 조상님에 관해서는 비교적 소상한 기록(記錄)이 남아 있으나

그 외 조상님에 관해서는 생전 삶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비록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한 조상님이라도 자식이나 후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찌 모자람이 있겠는가. 

현조행적(顯祖行蹟)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이름을 높이 드러낸 조상님이 하신 일이나 업적(業績)을 일컬으나,

여기서는 돌아가신 조상님이 하신 일이나 업적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또한, 초계(草溪) 변씨(卞氏) 문중(門中)에 훌륭한 조상님이 많이 계시지만

본 자료는 나의 직계(直系) 비속(卑屬)들이 조상님께서 살아오신 발자취를 살펴보고

자신이 살아갈 인생관(人生觀)이나 가치관(價値觀)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교육용으로 편집하였으므로

나의 직계 조상님에 관한 사항만 기술하였다.

시조(始祖) 할아버지부터 19세(世) 할아버지에 관한 내용은 기존 문헌에서 발췌하여 일부내용을 보완하였으며,

26세(世) 이하의 조상님에 관한 내용은 내가 구전(口傳)으로 전해들은 이야기와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느낀 사실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독하여 우리 집안의 가풍을 이해하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고자료로 활용했으면 한다.

시대가 크게 변하였는데 조상님과 동일한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답습(踏襲)하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가풍을 살아가는 시대에 알맞도록 슬기롭게 조화시키는 일은 그 시대를 살아갈 너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 세부내용은 첨부한 파일에 담아 두었다 : 顯 祖 行 蹟(최종본).hwp

 

 

 

시조(始祖) 변정실(卞庭實)

 

(1) 변씨성(卞氏姓)의 유래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의 제6왕자가 처음 조()나라에 봉()해졌다가

후에 노()나라 변읍(卞邑)에 분봉(分封)되어 변()이라 성()을 삼았다. 천보연간(天寶年間)에 그의 후손인 변원(卞源)이 당()나라의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오르고 팔학사(八學士)의 한분으로서 현종(玄宗)의 명을 받들고 신라(新羅)로 와 경덕왕(景德王)2(743)에 시()와 예()를 가르치면서 신라에 정착하여 변씨(卞氏)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누대(累代)가 실전(失傳)되어 대를 이어가지 못하였고 고증과 문헌이 없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2) 시조(始祖) 및 본관(本貫)

 

고려(高麗)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며 문렬공(文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으신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라 하였다

 

(3) 밀양변씨(密陽卞氏) 분적(分籍)

 

고려(高麗) 때 국자진사(國子進士)가 된 4세 변고적(卞高廸)이 밀양에 세거(世居)하여 밀양변씨(密陽卞氏)로 분적(分籍)되었다. 밀양변씨도 시조 변정실의 같은 자손으로서 대종회(大宗會)를 같이 하고 있다.

 

문헌 : 초계,밀양 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이조참판공파선적지(吏曹參判公派先蹟誌)

 

8변 빈(卞 贇)

 

고려말(高麗末) 대호군(大護軍) () 변경(卞卿)의 아들로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정이품(正二品)이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에 판서 성만용(判書 成萬庸), 박사 정몽주(博士 鄭夢周), 제학 홍재(提學 洪載), 대사성 이색(大司成 李穡), 전서 김성목(典書 金成牧), 전서 조열(典書 趙悅), 진사 이오(進士 李午), 단구 김후(丹邱 金厚) 등과 때 없이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며 세상을 한탄(恨歎)하고 슬픔을 달래는 시()를 주고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은()나라가 망할 때를 상기하여 서로 말하기를 은()나라에는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왕을 간()하다 죽음을 당하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우리도 각자의 뜻에 따라 처신(處身)하자 하니 다 말하기를 좋다하고, 홍재(洪載)는 삼가(三嘉)로 돌아가고, 김후(金厚)는 상산(商山)으로 갔으며, 조열(趙悅)은 함안(咸安)으로 돌아갔다, 변빈(卞贇)선생은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자정(自靖)하여 고려조(高麗朝)에 충절(忠節)을 지켰다. 고려충신 두문동(杜門洞) 72()의 한분으로서 개성(開城)의 두문동서원 표절실정절반 제이위(杜門洞書院 表節室靖節班 第二位)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봉안문(奉安文)

 

! 선생이시어 초계(草溪)의 전통있는 집안으로 고려(高麗)에서 평리(評理)를 지내셨으나 황천(皇天)이 돕지 아니하여 나라의 운세(運勢)가 이미 끝났도다. ()의 집에 하루 저녁 친구를 초청하였으니 성씨(成氏), 홍씨(洪氏), 정씨(鄭氏), 이씨(李氏)로다.

()나라에 삼인(三仁)이 있었으니 비간(比干)은 죽고, 미자(微子)는 떠나갔으며, 기자(箕子)는 종이 되었도다. 각자가 뜻에 따라 행동하자 말을 마치고 모임을 파하니 두문(杜門)골이 가히 청결(淸潔)한 곳이라 하고 남쪽 궁궐(宮闕)을 바라보며 통곡하여 슬퍼하고 우리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끝났도다 하였는데 진실로 선생의 망복지의리(罔僕之義理)로다.옛 마을에 사람은 새로운데 천리(天理)는 어길 수 없어 정절반(靖節班)에 향사(享祀)를 올리고자 맑은 바람 오랜 세월에 살찐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바치오니 흠향(歆饗)하옵소서.

 

문헌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두문동서원지(杜門洞 書院誌) 색인번호 고2107-80

이조참판공파선적지(吏曹參判公派先蹟誌)

초계,밀양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성구사지(誠久祠誌)

 

*두문동(杜門洞) 72현과 초계 변씨 8() () () 할아버지에 관한 세부내용은 내가 여러 가지 문헌에서 관련내용을 발췌, 수정 보완하여 별첨하였다.

 

9변남룡(卞南龍)

 

고려말(高麗末) 문하평리(門下評理) 변빈(卞贇)의 아들이다. ()는 운경(雲卿), ()는 정암(靜庵)이다. 고려 공민조(恭愍朝)에서 현량과(賢良科)에 등과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고 조선(朝鮮) 태종원년(太宗元年:1401)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다. 정종복위사건(正宗復位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장남 혼()과 함께 화()를 입고 태종원년(太宗元年) 29일에 별세하였다.

 

10변효경(卞孝敬)

 

조선(朝鮮) 태종원년(太宗元年)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변남룡(卞南龍)의 여섯째 아들 이다. 세종원년(世宗元年:14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사간원좌사간(司諫院左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문종원년(文宗元年:1451)에 병조참의(兵曹參議), 단종원년(端宗元年:1453)에 인수부윤(仁壽府尹), 단종 3(1455)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대도호부사(大都護府事)를 지내고 세조(世祖) 2(1456) 65일 별세하였다.

 

13변 온(卞 溫)

 

이조참판공(吏曹參判公) 변효경(卞孝敬)의 증손자이며 조선(朝鮮) 세조조(世祖朝)에서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우윤(右尹)을 지낸 변옥(卞玉)의 아들이다. ()는 청헌(淸軒), 성종(成宗) 5(1474)에 출생하였다. 중종(中宗) 10(1515)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동복현감(同福縣監), 장흥부사(長興府使), 홍문교리(弘文校理)를 지내고 명종(明宗) 9(1554) 1013일 별세하였다.

 

16변국수(卞國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변온(卞溫)의 증손자이며 진사(進士) 변대손(卞大孫)의 셋째 아들이다. 명종조(明宗朝)에서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에 등과하였다.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晋州郡良田面)로 이주하여 오늘날의 진사공파(進士公派) 양전변문(良田卞門)을 이루고 있는 이곳의 시거조(始居祖)이다. 장남 변백(卞栢)은 김해(金海)로 이주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무과부정(武科副正)에 등과하였다. 차남 변죽(卞竹)은 곁에 두었고, 손자 변연수(卞延壽)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가르쳤다. 훗날 임진왜란 순국충절의 위인이 되어 역사에 빛나고 있다.

 

문헌 : 조선조실록(朝鮮朝實錄), 이조참판공파선적지(吏曹參判公派先蹟誌), 초계밀양변씨족보 (草溪密陽卞氏族譜)

 

18세 변연수(卞延壽


조선(朝鮮) 중종 33(1538) - 선조 30(1597)  

선조(宣祖) 때 무신(武臣)으로 충신이며 자()는 오원(五元)이다. 고려말(高麗末) 충신인 문하평리(門下評理) 변빈(卞贇)10대손이고, 조선 단종조(端宗朝) 이조참판(吏曹參判) 변효경(卞孝敬)8대손이며, 경남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晋州郡良田面)의 시거조(始居祖) 진사(進士) 변국수(卞國秀)의 손자이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변훈남(邊勳男)에 수학하였는데 춘추(春秋)를 배우고 그 대의(大義)를 강론하매 그의 선생이 탄복하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武藝)에도 능하여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한 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선조(宣祖)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순신(李舜臣)장군 휘하에서 왜적과 싸웠다.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왜선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여 남다른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어서 선조(宣祖) 30(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아버지를 따라 의병(義兵)으로 참전한 아들 변입(卞岦)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정여(旌閭)를 세워 그의 공을 표창하고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녹권(錄券)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 성구사(誠久祠)에 배향되어 있고, 양촌리에 있는 삼강여(三綱閭)에 현양(顯揚)되어 있다.

 

문헌 : 국립중앙도서관소장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시장(諡狀), 교 지(敎旨), 국사대사전(학원출판공사),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표준국 어대사전(국립국어연구원), 초계,밀양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성구사지(誠久祠 誌), 진전면지(鎭田面誌).

 

19변 입(卞 岦)

 

조선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 선무공신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변연수(卞延壽)의 아들이다. ()는 정숙(正肅), 선조(宣祖)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으로서 아버지를 따라 참전하여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어서 선조(宣祖) 30(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 때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고 아버지 변연수(卞延壽)와 함께 정여(旌閭)를 세워 그의 전공과 순국충절과 효정신을 기리도록 명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일암리에 있는 성구사(誠久祠)에 아버지와 함께 배향되어 있고 양촌리에 있는 삼강여(三綱閭)에 아버지의 충()과 같이 효()의 표상으로 현양(顯揚)되어 있다.

 

문헌 : 교지(敎旨), 증병조판서변연수공시장(贈兵曹判書卞延壽公諡狀), 이조참판공파선적지 (吏曹參判公派先蹟誌), 초계,밀양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성구사지(誠久祠誌).

  

19변 입(卞 岦)의 처 안동김씨(安東金氏)

 

증좌승지(贈左承旨) 변입(卞岦)의 부인으로서 평소에 어진 행실이 나타났었다. 선조(宣祖)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이 아버지 변연수(卞延壽)를 따라 의병(義兵)으로서 참전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전공을 세우고 선조(宣祖) 30(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하였다. 부인은 남편과 아버지가 함께 순국(殉國)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8일간에 식음을 전폐(全廢)하고 남편을 따라 순절(殉節)하였다. 조정에서 변연수(卞延壽)와 변입(卞岦) 부자(父子)와 함께 정여(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여 열여(烈女)의 표상으로 삼고 숙부인(淑夫人)을 추증하였다. 경상남도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에 위치한 삼강여(三綱閭)에 일가삼절(一家三節)의 충() () () 표상으로 현양(顯揚)되고 있다.

 

문헌 : 교지(敎旨), 증병조판서변공시장(贈兵曹判書卞公諡狀), 삼강여기(三綱閭記), 이조참판 공파선적지(吏曹參判公派先蹟誌), 초계,밀양변씨족보(草溪密陽卞氏族譜).

 

*이상의 내용은 초계변씨 훌륭한 인물중 나의(31) 직계(直系) 선대(先代)에 관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25변지영(卞智營)

 

26변 직 (卞 金+)

 

나의 6대조인 25() () 지영(智榮)4(막내)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기연(箕淵), 옹연(雍淵), 용수(龍洙)  등 3형제를 두셨으며 2(옹연)은 셋째 형의 양자(養子)로 보냈다. 생전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장자(長子) 상속제(相續制)이던 시대에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셨으며, 구한말 피폐해진 농민들의 생활상을 고려해 볼 때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셨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안에서는 4() 봉제사(奉祭祀)를 모셨기 때문에 내외분에 대한 제사를 모셨던 일이 기억난다. 묘소(墓所)는 진전면 동산리 선영(先塋)인 금강묘원(金崗墓苑) 맨 위쪽에 배() 청송(靑松) 심씨(沈氏)와 합장하여 모셔져 있으며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 집안의 재실(齋室)인 추모재(追慕齋)에서는 매년 음력 10월에 25()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모여 기제사(忌祭祀)를 모시지 않는 조상(祖上)님들께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다.

 

27변기연(卞箕淵)

 

집안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셨으나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며, 근면하고 부지런하셨으며 성품이 매우 인자하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연정기(居然亭記)에 의하면 부친을 일찍 여의고 편모(偏母)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주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고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어짊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슬하에 외동아들을 두셨으며 아들이 서당에 공부하러 갈 때면 식사를 직접 날라 주실 정도로 자식의 학업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생전에 20마지기 정도의 전답(田沓)을 장만하셨으며 집안의 살림 운용을 일찍이 아들에게 일임하시어 부농(富農)을 일구는 기반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묘소(墓所)는 진전면 동산리 선영(先塋)인 금강묘원(金崗墓苑) 아래쪽 조금 떨어진 곳에 향나무 고목으로 둘러싸인 부지에 배()와 쌍분(雙墳)으로 모셔져 있다. ()는 칠원(漆原) 윤씨(尹氏)이며 생전에 촬영한 사진이 보존되어 있어 용모를 볼 수 있다. 묘소(墓所)는 당초 지금의 자리에 마련되었으나 지관(地官)이 풍수상 명당이라고 지정해 준 장소로 1차 이장(移葬)하였으며, 후일 부근 마을주민들이 묘소의 위치가 마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이장을 강력히 요구하여 현재의 위치로 다시 이장(移葬)한 것으로 전해진다. 묘소에는 비석(碑石)과 상석(床石) 및 망주석(望柱石)이 조성되어 있다. 

 

28변상용(卞相瑢

 

 

부친으로 부터 물려받은 중농(中農) 정도의 재산을 잘 운용하고 근검절약하여 천석(千石)꾼의 재산을 일구었으니, 한 때는 창원군 관내에서 가장 많은 전답을 보유한 부자였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8형제를 두셨으며 몇 분은 한학을, 몇 분은 일본, 서울, 부산 등지에 유학을 보내시어 신교육을 받도록 하셨다. 조상님들을 위해서는 재실(齋室, 追慕齋)을 지어 종중의 큰집에서 관리하도록 하시고, 선친(先親)을 추모하는 뜻에서 거연정(居然亭, 진전면 양촌리 계양부락에 위치)을 건축하고 관리용 전답을 거연정 건물 명의로 등기하여 남기셨다. 또한, 마을에 양촌초등학교를 건립할 때는 소유부지를 희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재산을 일구었으나 본인은 검소하게 생활하셨으며 부모님과 조상님에 대한 효성은 지극하셨던 것으로 사료된다. 생전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 찍은 기념사진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어 두 분의 용모를 알아볼 수 있다.

()는 선산(善山) 김씨(金氏)이며, 묘소(墓所)는 진전면 동산리 선영(先塋)인 금강묘원(金崗墓苑) 중간부에 모셔져 있다. 증조부님 묘소가 좌측(묘소에서 앞쪽을 바라볼 때)에 위치하고 증조모님 묘소가 우측 약간 아래쪽에 모셔져 있는 것은 증조부님의 묘소를 모실 때 토지의 소유권이 문중(門中)으로 되어 있어 후일 더 좋은 장소로 이장(移葬)할 계획이였으나 후일 지관(地官)이 현재의 산소 위치가 좋다하여 나의 조부님(29)께서 현재의 금강묘원 일대 토지를 문중으로부터 사들이고 증조모님 묘소를 좌측에 모실려고 했으나 지형이 기울어져 있고 우측이 풍수지리(風水地理)상 더 좋다하니 옛날 관습상 바로 우측에 모시지 못하고 약간 아래쪽 우측에 모신 것으로 전해진다. 묘소에는 비석과 상석, 망주석, 동자석(童子石)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양촌리 동네 한 가운데에는 자손들이 생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해 놓은 유허비(遺墟碑)가 이곳을 찾는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生 1879(기묘년).4.6. 卒 1941(신사년).1.9

 

 

 

29변인섭(卞仁燮)

 

8형제(, , , , , , , )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한학(漢學)을 공부하셨으며, 한 때는 양조장과 정미소를 운영하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향각지(京鄕各地)의 훌륭한 학자(學者)들을 찾아가 거연정명(居然亭銘), 거연정기(居然亭記), 거연정상량문(居然亭上樑文), 거연정원운(居然亭原韻), 차거연정원운(次居然亭原韻), 차거연정운(次居然亭韻)등의 글을 부탁하여 편액(扁額)을 만들고 여러 개의 주련(柱聯)을 새겨 선친께서 건축한 거연정(居然亭) 건물에 설치함으로써 정자(亭子)를 완성하고 학자들과 교류하셨다. 천석꾼의 재산을 물려 받았으나, 동생들을 모두 결혼 및 분가(分家)시켰고 정부(政府)의 대대적인 농지개혁(農地改革)에 의하여 소작(小作)을 주었던 전답(田沓)들의 소유권이 대부분 정부로 넘어감에 따라 가세(家勢)가 기울기 시작했다. 4대 봉제사(奉祭祀)등 유교적(儒敎的)인 가풍(家風)을 이어가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내가 어린 시절 증조부모(曾祖父母)님 제사를 모실 때 장만하였던 제수(祭需)나 제사를 모시러 오는 참사자들의 수효를 보면 어지간한 집안에서 잔치를 하는 수준이였다.

지금 시대에서 돌이켜 보면 허례허식(虛禮虛飾)이라 생각될 지 모르나 그 당시 양반가문(兩班家門)을 지향(志向)하던 가치관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시대상황이였으리라.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보전(保全)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하셨으며 기분이 좋으실 때에는 시조를 읊으시곤 하셨다. 6.25사변 전부터 밤이면 빨갱이들이 동네로 몰려와 노략질을 일삼자 인근 도시인 마산으로 이주(移住)하셨다. 양촌리(良村里) 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천석꾼의 잘 지어진 한옥(韓屋)6.25 사변 등을 거치며 손상되어 현재는 빈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손자들을 좋아하셨으며 특히 장손(長孫)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다. 驪州 李氏이며 묘소는 금강묘원 중간부에 합장하여 모셔져 있다. 묘소에는 비석과 상석, 둘레석, 망주석, 석등, 동자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부부가 돌아가신 해는 달라도 돌아가신 날짜가 동일하여 같은 날에 제사를 모신다. 配 驪州 李氏98()까지 장수하셨으며 말씀도 잘 하시고 손자, 손녀들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生 1898년. 卒 1968년 11월 10일(음력)

 

* 농지개혁

1948년에 농지개혁이 있었다. 정부가 지주에게 '지가증권'을 발행해주고 농지를 매입하여 이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유상 분배했다. 지가증권은 물가가 뛰자 휴지조각이 되다시피 했다. 발 빠르게 이를 산업자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대지주가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0변재덕(卞在德)

 

3째 집안(諱 禮燮)44녀중 장남으로 태어나셨으나 큰집에 아들이 없어서 종손(宗孫)으로 간택(簡擇)되어 양자(養子)로 입적(入籍)되셨다. 종손을 간택할 때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했겠지만 사주가 좋은 것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 시대 천석꾼 집안의 종손으로 간택되어 종가를 이끌어 가게 되셨으니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31)가 어렸을 적에 조부님과 종조부님들로부터 우리 집안은 양반가문이니 언행(言行)을 예의(禮儀) 바르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듣고 훈육(訓育)을 받으면서 자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통적인 의미의 사대부가(士大夫家) 양반(兩班)은 아니였어도 양반가문을 지향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집안 어른들이 생각하시는 근저에 이러한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교통상황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한 산청군 단성면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진정한 의미의 양반집(安東 權氏) 규수(閨秀)인 나의 어머님과 혼인을 하시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나의 어머님 집안에는 가까운 선대에 벼슬한 분이 계시고 양반 집안으로써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 슬하(膝下)42녀를 두셨고 대학은 결혼 후에 다니셨으며 서울에서 대학 공부를 하시던 중 6.25사변이 일어나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하셨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학을 졸업하신 후 잠깐 마산시청에 근무하신 적이 있지만, 평생(平生)을 교육계(敎育界)에 헌신(獻身)하셨다. 장남(長男)이 미국(美國)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아들은 네 명인데 손자는 두 명 밖에 두지 못한 것을 서운해 하셨다. 종손으로서 집안대소사를 처리하시면서 숙부(叔父) 및 종제(從弟)들과 협의하여 조부의 유허비(遺墟碑)를 고향마을 양촌리에 조성하고 주변을 조경(造景)하셨다. 또한 선영인 금강묘원 주변 정비와 합배단(合拜壇)을 설치하셨다. 2004년도에는 집안의 큰 경사인 회혼례(回婚禮, 결혼 60 주년)를 자손들과 일가친척,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대히 올리셨다. 생전에 내색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천석꾼 집안의 종손(宗孫)으로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으나 농지개혁(農地改革)으로 인하여 가세(家勢)가 기울어 갈 때 마음이 무척 아프셨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86세 되시던 해 봄 감기 끝에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자기 돌아가시니, 그 때가 2008년 음력 426일 저녁이였다. 묘소는 금강묘원 아래쪽에 위치하며 현재는 상석만 조성되어 있으나 비석등 다른 석물(石物)들은 후일 자식들이 조성하기로 기약되어 있다.

약력(略歷)

1923.1.19일 출생

1943년 일본 동경철도학교 졸업 1944년 결혼

1947년 동아대학 예과 수료 1951년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졸업

1951~ 1965년 마산동중, 마산여중 재직

1965~ 1972년 진전중학, 진해여중, 진해여고, 마산여고 교감으로 재직

1972년부터 웅양, 창녕, 구남, 함안중학 교장으로 재직 1988년 정년퇴임

1962년 대통령 면려표장, 1963년과 1977년 우량공무원 표창, 1984년 교육공로상, 1987년 대한교련 연공상, 1988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 8世  변  빈(卞  贇) 아버지 관련 내용중 기자, 비간, 미자 관련내용 해설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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