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경조사)/선영, 삼강려

선영과 삼강려

돌샘 2015. 5. 31. 11:22

선영(先瑩)과 삼강려(三綱閭)

(2015.5.25)

아버님 기일인 6월 12일(음력 4월 26일)에 다시 본가에 내려올 예정이지만

그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이번 모임에는 승용차가 필요해 장거리 운전을 했다.

승용차가 있는 이번에 선영을 찾기로 계획했다.

예전에 추석 벌초를 하기 전 선영을 찾았을 때 산소에 길게 자란 잡풀이 눈에 거슬리고

한편으로는 죄스럽기도 하여 손으로 뽑아내기도 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님과 조부모님 산소에 자란 잡풀이나마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양손을 이용하는 큰 전지가위를 준비해 두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큰형님내외분도 아직 산소를 찾지 않으셨기에 같이 가기로 하였으며 여동생내외도 동행하기로 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부부는 선영에 들렀다가 바로 상경하려고 어머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선영으로 향했다.

선영으로 올라가는 길은 숲길이라 그늘이 졌지만 산소는 땡볕이 내리쬐었다.

아버님 산소와 조부모님 산소는 모두 잔을 올리고 절한 후에 고하여 올렸지만

윗대 5대조부모님 산소까지는 형님과 두 사람만 차례로 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준비해 온 전지가위로 산소주변 잡풀을 정리하기 시작하니 이른 더위로 온몸이 땀에 젖어들었다.

형님과 교대를 하고 다시 매제와 교대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평상시에는 혼자 해야 될 일인데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긴 매사가 마음먹기 나름이니 정성과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흘린 땀은 세수를 하고 나면 더 상쾌해질 것이다.

 

양촌마을로 들어가 증조부님 유허비와 옛 집터를 둘러보았다.

부근에 있는 초계 변씨 세거지(草溪 卞氏 世居地)와 삼강려(卞氏 三綱之閭)도 둘러보았다.

삼강려에 대한 소개 글을 여기에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변연수(卞延壽)장군은 조선 중종33년(1536년) 이곳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주부의 벼슬에 올랐으나 휴관으로 향리에서

쉬고 있을 때 임진왜란(1592년)을 맞게 되자 아들 변입(卞岦)과 함께 신하된 자 몸을 던질 때로다 이르고 즉각 격문을 내어 원근에서 의병을 모아 연해의 출몰 왜적을 격퇴하고 이순신장군 휘하에 합류하여 당포와 옥포 해전에서 적선을 크게 무찔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1597년) 때 당포해전에서 아들 변입(卞岦)과 같이 사력을 다해 적과 싸우며 용전하다 전사하니 나라 위해 충(忠)으로 죽었다. 아들 변입(卞岦)은 전사한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며 마지막까지 분전하다 그도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효(孝)로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 소식을 접한 변입(卞岦)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식음을 끊은 지 8일 만에 자절 함으로써

아내는 남편 뒤를 따라 열(烈)로서 죽게 되니 나라에서는 변연수(卞延壽)장군에게 증 병조판서 아들 변입(卞岦)에게는 증 좌승지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에게는 증 숙부인의 첩자를 내리고 충(忠) 효(孝) 열(烈)의 일가삼강(一家三綱)을 기리는 정려를 내려 후세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변연수(卞延壽)장군은 나의 13대 조부이시고 변입(卞岦)장군과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나의 12대 조부모이시다.

세월이 많이 흐른 조상님의 행적이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찌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몸에도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음이리라.

옛날 옹기 굽던 가마터에 자리한 한식집을 찾아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부부는 서울로, 큰형님과 여동생 내외는 마산으로 향했다.

이번 3일 연휴는 집안일로 이곳저곳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마땅히 해야 할 보람된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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