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정/현판, 편액, 주련

거연정기(居然亭記)

돌샘 2018. 12. 21. 22:14

거연정기(居然亭記)

(2018.12)

11월 초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딸아이가 카톡으로 ‘이 블로그에 아빠 블로그 글 참고했네요.’하는 문자와 함께 블로그 주소를 보내주었습니다. 뭔가 하고 보았더니 거연정 관련 사항이라 관심을 가지고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 블로그 글을 참고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산문화원에서 발행한 마산문화지(2004)에 수록된 거연정기(居然亭記) 2편이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연정에는 상량문, 거연정명, 거연정기, 원운과 차운 등의 편액과 주련들이 많이 걸려있습니다. 한문능력이 일천하여 제대로 해석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거연정명(居然亭銘)에 대한 어설픈 해석과 바램을 블로그에 올린 적(2015.10.31.)이 있습니다. 그 뜻이 부분적이나마 이루어지는 것 같아 기쁜 마음 그지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배워 익히는데 무엇을 가리며 무엇을 부끄러워 하겠습니까? 거연정에 관한 좋은 내용을 올려놓으신 분(천부인권)께 감사드리며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여 여기에 싣습니다(오자로 보이는 부분은 수정함). 아울러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준 딸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2018.3.20 진전면 양촌리 개양마을 거연정 입구

진전면은 갈 때마다 느끼지만 전통마을의 형식을 잘 갖춘 곳이며 사람의 도리를 버리지 않고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 있는 박물관 같은 지역이다. 마을 곳곳에 전통형식의 재실과 사당및 정려와 포창비를 세웠으며 도심에서는 사라진 노거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우연히 시작한 노거수의 정리가 거의 끝나는 시점이라 창원시에 산재한 비문들을 찾아보면서 함께 재·루·정(齋·樓·亭) 등을 살피고 있다. 한문을 많이 몰라 어려움이 있지만 모르니까 공부하는 것도 점점 재미를 더한다. 거연정(居然亭)은 변상용(卞相瑢)이 자신의 선조를 그리며 지은 정자로 창원시 진전면 개양길 9-24에 위치한다. 개양마을은 양촌리에 속해 있지만 양촌리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마을규모는 작다. 이 마을의 가장 위쪽 산자락에 위치한 거연정은 적석산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거연정의 입구에는 분홍빛이 도는 만첩매화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워 운치를 더한다.

 

 

담장 넘어로 본 거연정

 

 

거연정의 동백나무에 꽃이 피었다

 

 

거연정기(居然亭記)                                                                                             

자식(子息)된 사람이 효를 하는 것은 그 일이 다단(多端)한데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업을 잘 전술(傳述)하는 것이 크다. 덕선(德善)과 청취(淸趣)로 어버이가 일찍 하고 자 하는바에 마음을 쓰는 것은 자식이 그 선세(先世)에 욕됨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부모에 있어서 어질게 되고 효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진양(晉陽)의 양전(良田)은 산수가 넉넉하고 풍토(風土)가 아름답다. 변공 기연(卞公 箕淵) 자 응서(應瑞)가 그 속에 은거(隱居)하면서 선(善)을 행하였다.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였는데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가정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봉양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편모(偏母)를 모심에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대를 받듦에도 정성을 다하였으며 사람을 구제(救濟)하는 것을 좋아하여 의리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에는 어렵게 반평생에 이룬 재산을 즉석(卽席)에서 천금(千金)을 내 놓는 것을 아끼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다 한결같이 그 어짊을 칭송(稱頌)하였다. 공은 일찍 한 구역(區域)의 경치(景致) 좋은 선영(先塋) 아래에 터를 잡아 놓고 매년 성묘하고 나면 그 사이를 거닐면서 즐거이 세속의 더러움을 잊었다. 견씨(甄氏)의 사정(思亭)과 주자(朱子)의 한천(寒泉)과 같은 정자를 지을 것을 생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그 아들 상용(相瑢)이 선대의 법을 지켜 잘못하지 아니하며 잊지 아니하였다. 또 선공(先公)의 청취(淸趣)의 자취가 없어져 가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하여 경치(景致) 좋은 곳에 좌우(左右)가 넓은 정자를 지으니 산수가 채색(采色)을 더하고 마룻대 위에 얹은 기와와 서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데 거연정(居然亭)이라고 현판(懸板)한 것은 주자의 시에서 취한 것이다. 상용군(相瑢君)이 천리를 달려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일찍 나의 선인과 지헌(持憲) 일가 어른과 함께 정성(精誠)을 다한 것이 진실로 오래 되었는데 선조의 사당을 지을 때에는 천리를 멀다 않고 몸소 와서 찬양(贊襄)하셨는데 지금 선인의 정자를 짓는데 어찌 한 말씀으로 기문을 지어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일어서서 말하기를 「아버지가 착하고 아들 또한 착하며 아버지가 성품(性稟)이 깨끗하고 아들 또한 성품이 깨끗하니 이는 선인의 뜻을 이어 일을 잘 전술하는 뜻 있는 선비의 아름다움이니 어질도다 아버지여! 효자로다 아들이여! 내가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일을 이 사람에게 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多幸)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부자(父子)된 사람들은 다 이를 본받으면 어찌 인륜(人倫)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람답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상용군(相瑢君)이 안색(顔色)을 변하며 감(敢)히 당치 않는다고 사절(謝絶)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또 말하기를 「군의 겸손(謙遜)도 또 착하다. 군의 집에 아들 여덟 사람이 훌륭한 사람의 뒤를 이었으니 때를 만나면 창대(昌大)하여질 것이다. 요(堯)임금과 같은 성인도 아들이 많으면 오히려 근심이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 여덟 아들 된 사람들이 부조(父祖)의 선을 이어 전술(傳述)하면은 그 몸과 마음이 청백(淸白)하여져서 좋은 천석(泉石)을 대하여도 부끄럽지 않아 거연정(居然亭) 가운데에 아름다운 자손이 어진 아버지의 두터운 마음이 풀어질 뿐만 아니라고 장차 변씨가문(卞氏家門)의 으뜸가는 문중이 되어서 세상에 무궁(無窮)하게 뻗어 나아갈 것이다.」하니 상용군(相瑢君)이 기뻐하면서 「선생님의 말씀이 또한 훌륭합니다. 돌아가서 편액(扁額)을 사치(奢侈)하게 꾸미겠습니다.」하였으니 부자가 서로 느낌이 있을 것이다.

丙子(1936)年 가을에 首陽 오운영(吳雲泳)이 서운산(瑞雲山)의 망화재(望華齋)에서 쓰다.

 

居然亭記

人子爲孝其事多端而繼述爲大德善之與淸趣皆親之所嘗致力而成之其人父子之爲賢爲孝孰大焉晉陽之良田饒山水風土之景卞公箕淵字應瑞隱居行善於其中盖公早孤貧力穡成家痛不逮嚴君養偏慈無所不用其誠誠於爲先樂於濟人義所當爲則以其艱難半生所成之財不惜立地用下千金鄕人咸一口誦其賢公嘗卜一區淸泉白石於先壟下每省楸餘徜徉其間樂而忘歲之塵穢也準擬置一亭如甄氏之思亭晦翁之寒泉而不及就而卽世克家子相瑢遵先法而不愆不忘又不忍先公之淸趣無跡有亭翼然臨于泉石爲之增色棟甍相與稱美而扁以居然盖取諸晦翁詩也因千里而見余曰子嘗於吾先人與持憲族公盡誠誠久先祠之役不惜千里躬榮而贊之今此先人之亭又惡可不一言以記之余興曰尊公之善而子又善尊公之淸而子又淸是以繼述志士之懿美賢者父也孝哉子也吾猶及見斯人斯事於斯世不其亦幸歟世之爲人父子者咸斯之法焉則安有倫亡而人不人相瑢甫忧然謝不敢自當若無所容其身余又曰子之謙又善矣子之家有八龍善人之後宜其有時昌大堯之聖猶懼有多男子今不爲八龍者若又克繼述父祖之善而淸白其身心不愧對好泉石而爲居然亭中佳子孫不但賢父之釋露心將卞門甲於世而無窮相瑢甫喜曰子之焉亦善矣歸而侈之楣父子相感戒

時柔兆困敦之蕭晨首陽吳雲泳書于瑞雲山之望華齋

[출처] 마산문화지(2004)-마산문화원

 

 

거연정기(居然亭記) 2

진양의 한 시골에 변처사(卞處士)가 계셨는데 은거(隱居)하면서 의(義)을 행한지 79년에 종족(宗族)이 그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고 향당(鄕黨)에서 그 덕을 칭송(稱頌)하였다. 처사가 돌아가자 아들 태견군(泰見君)이 흙을 높이 쌓아 무덤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묘역(墓域)을 표시하고 또 제유(祭儒)를 정결(精潔)히 장만하여 경건(敬虔)하게 제사(祭祀)를 받들며 가문을 이어 칭송(稱頌)이 있었다. 처사가 넉넉한 마음으로 한가(閑暇)로이 반환(盤桓)하던 곳에 자못 경치의 아름다움을 아끼어 정자(亭子) 한 채를 지으려다 끝내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몇 간(間)을 얽어매고 돌아가시자 그 아들들이 집을 완공하고 거연정(居然亭)이라 현판하였으니 그 뜻은 주자의 시어(詩語)를 취(取)하였으며 천리를 달려와서 나에게 기문을 요구하였다. 내가 보건대 남의 자손된 세상 사람들이 널리 전원(田園)을 두고 높이 담을 쌓아 집을 짓고 또 물 맑고 산 높은 곳을 택하여 별도(別途)로 정대(亭臺)를 놓고 스스로 효도를 지극히 다하였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자손들이 호화(豪華)에 익숙(益熟)하고 뜻이 방자(放恣)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옥(田屋)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정대(亭臺)에는 잡초(雜草)만 무성(茂盛)하게 되는 것이 열 사람 중에 팔·구명은 될 것이다. 그러니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물러준 계책(計策)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듣건데 처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하여 힘써 농사를 지으며 편모를 봉양하면서 남루(藍褸)한 옷을 입고 험(險)한 음식(飮食)을 먹으며 궁한 사람들에게는 변통(變通)하여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휼(救恤)하여 그 후손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며 성실하게 법도(法度)를 행하여 비록 윤리와 도덕이 없을 때를 만나도 홀로 고가(古家)의 풍도(風度)를 보존하게 하였다. 아아! 처사는 참으로 덕을 쌓아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물려주는 도를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청천(淸泉)과 백석(白石)이 어느 곳인들 있지 않으리요마는 현자(賢者)의 아름다운 발자취는 숭상(崇尙)할만 하구나 이에 그 덕을 칭송하여 거연정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戊寅年 四月 20일에 안동 김영한(金寧漢)은 벽오산(碧梧山)의 와운소(臥雲巢)에서 쓰다.

 

居然亭記2

晋之鄙有卞處士焉隱居行義七十九年宗族服其孝鄕黨薫其德及其歿也哲嗣泰見甫旣固封樹且潔烝嘗有克家稱矣處士於薖軸之地頗愛泉石之佳嘗欲置一亭而竟未就也故遂締構幾間以卒其志取朱夫子詩語扁之曰居然千里而徵余文余觀世之人未嘗不爲其子孫廣置田園高起垣屋又点泓崢別築亭臺自以爲至矣盡矣然若子若孫習於豪華放意肆志一瞚之頃田屋屬之別人亭臺鞠爲茂草如是者十居八九矣然則裕後之計果安在哉盖聞處士蚤孤而貧耕稼養母縮衣貶食通窮而恤匱能使其子孫習熟規矱雖逢閉寒之會獨保古家之風鳴呼處士眞智裕後之道者也淸泉白石何處士有賢者芳躅是可尙焉乃頌其德以爲居然亭記黃虎乾之再吉安東金寧漢書于碧梧山之臥雲巢中

[출처] 마산문화지(2004)-마산문화원

[인용한 출처] 다음 블로그 역사와 야생화/천부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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