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샘 이야기/살며 생각하며

정지용 문학 탐방과 대학 새내기 시절 추억

돌샘 2024. 4. 7. 21:04

정지용 문학 탐방과 대학 새내기 시절 추억

(2024.3.30.)

주말 오후에 중학 동창들과 정지용 문학 탐방에 참여했다. 지하철 3호선 녹번역 2번 출구에서 만나 여류시인의 안내를 받았다. 산기슭 아파트 사이로 난 비탈길을 한참 오르자, 주택가가 끝나는 곳 산 쪽에 축조된 커다란 옹벽에 정지용의 시 녹번리가 적혀 있었다. 부근 공터에 걸터앉아 정지용 시인의 약력과 6.25 동란 중 행적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산에는 노란 개나리꽃과 벚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불광동 쪽으로 걸었다. 한참 가다가 꺾어져 이면도로로 들어서니 정지용길이라는 작은 뒷길이 나왔다. 그 길 중간쯤에 있는 연립 주택 건물에 정지용 초당(草堂) 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1948년 당시 이화여전 교수 겸 경향신문 주필이었던 정지용은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이 터에 6칸 초가를 짓고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작품활동에만 몰두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녹번동은 내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70년 봄, 대학 1학년 1학기 새내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당시엔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이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중·고등학생 가정교사로 입주하는 일이 제법 있었다. 서울지리에 어두웠던 시골뜨기 신입생은 현재의 녹번역 부근 어느 집의 가정교사로 서울 생활의 첫발을 내딛었다.

지금은 교통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 버스를 갈아타고 공릉동에 있는 학교까지 가려면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자연히 아침에 있는 첫째 수업시간은 지각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대학 새내기 생활은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인간적인 신뢰 관계를 생각해서 한 학기 동안은 견뎌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어리석고 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 시골출신 대학 신입생이 자기 입맛에 맞는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 지나간 일이니 내가 택한 길이려니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어쩌면 그런 인연들이 모여 만학의 길을 택하고 50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파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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