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샘 이야기/집안 스토리텔링

6.25와 조상님의 음덕

돌샘 2017. 6. 24. 19:55

 

6.25와 조상님의 음덕(蔭德)

(2017.6.25)

요즘은 다양한 종류의 동화책이 발간되어 언제든지 원하는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으나 나의 어린 시절엔 동화책이 무척 귀했다.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구전 전래동화를 자주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부분 부모님에 대한 효도, 나라에 대한 충성, 형제간의 우애 등이었으며 간혹 조상님의 음덕(蔭德)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교적인 잔재요소가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효도, 충성, 우애 등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조상님의 음덕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개구쟁이 소년이 심한 장난을 치다가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 때 조상님이 과거에 베푼 덕으로 인하여 무사히 구제된다는 내용이었다. 앞선 3가지 종류의 이야기와 달리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가 재미를 더했다. 조상님의 음덕에 관한 이야기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믿음이나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복(五福)중의 하나로 유호덕(攸好德)이란 것이 있다. ‘덕을 좋아하고 즐겨 행하는 것’을 말하며 덕을 베풀면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해진다는 말이다. 현재의 가치관으로 보면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중요한 전통적 가치관의 일례다. 불교에서는 좋은 인연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인연을 지으면 나쁜 과보가 일어난다는 인과법을 제시한다.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지만 시차를 두고 일어난다고 한다. 인연과보가 즉시 나타날 때도 있고 늦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후손 대에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모두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오늘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이 되는 날이다.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셈이다. 우리집안은 지방의 지주계급에 해당하여 6.25를 전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6.25이전부터 빨갱이들이 발호하여 밤이 되면 수시로 위협을 가하자 집안의 장자인 할아버지께서는 부득이 인근도시인 마산으로 피신하셨다. 고향인 경남 창원시 진전면 양촌리는 한국전쟁 당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으며, 앞잡이 노릇을 하던 빨갱이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집안의 대가족은 연고가 있거나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몇 곳으로 나누어 피난을 갔으며, 진전면장의 공직자로서 책임을 다한 종조부께서는 빨갱이들의 손에 돌아가셨다. 고향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종가의 한옥은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6.25는 우리민족에게 큰 시련을 안겨준 재난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집안이 드물 정도이다. 내가 나의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요점은 6.25 한국전쟁 당시 우리집안이 입은 큰 피해가 아니라 선친께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 불행 중 다행에 관한 일. 즉, 조상님의 음덕(蔭德)에 관한 이야기이다.

 

6.25가 발발했을 때 선친께서는 고향에 가족을 두고 성균관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라 서울에 머물고 계셨다. 전황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피난할 시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하숙집 지하실에 숨어 지내셨다고 한다. 숨어 지낸지 며칠이 지나자 갑갑하기도 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여 조심스레 외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민군에게 발각이 되어 체포되었고 서울에서 북쪽으로 물자를 운반하며 끌려가는 강제노역자 신분이 되었다고 한다. 지주집안의 장손이었으니 신분이 노출되면 더 심한 탄압을 받을 수도 있었고 정든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처자식과 영영 이별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훗날 이 때를 회상하며 정말 난감하고 만감이 교차했다고 하셨다. 도리 없이 강제노역을 하며 서울을 벗어나 북쪽으로 며칠 간 끌려갔다. 그러다가 북한군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사일생으로 도주를 하였다고 한다. 개전초기라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학생신분이라 의심을 덜했기에 도주가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낮엔 몸을 숨기고 야간을 틈타 남하하며 갖은 고생 끝에 하숙집에 되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무너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만약 인민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계속 지하실에 숨어 지냈더라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중간에 도주하지 못하고 북한으로 끌러갔더라면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산가족의 한이 맺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와 내아래 동생 등 4명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말씀이 적은 분이셨지만 6.25 때 겪은 이 일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몇 번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보다는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의 힘이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결국 조상님의 음덕(蔭德)이 종손의 목숨을 실리고 종가를 유지할 수 있게끔 도와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후손을 위해서도 좋은 일 많이 하고 덕을 베풀어야겠다.

 

(선영과 고향마을 입구의 삼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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