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샘 이야기/여행과 답사(2021년)

영주 소수서원, 부석사 탐방

돌샘 2021. 12. 9. 14:14

영주 소수서원, 부석사 탐방

2021년 서남해안, 내륙여행 여섯째 날-2(2021.11.5.)

계획된 일정상의 여행은 오전에 끝났다. 국내여행으로 56일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막상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상경하는 길에 영주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들리기로 했다. 두세 번 방문했던 곳이지만 서원에 관한 기초지식이 없던 때라 이번엔 찬찬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풍기군수 주세봉이 1542년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을 세우고, 다음 해 백운동 서원을 건립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 받았다.

서원 자리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숙수사가 있던 곳으로 절의 당간지주가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소수서원은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 자연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는 유식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기준이 완성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다.

 

서원 진입부 유식공간(遊息空間)에는 멋진 노송과 영귀봉 그리고 계곡 건너편 경자바위취한대가 있었다. 정문인 지도문(志道門) 밖 오른쪽(사람 기준)에는 계곡을 따라 펼쳐진 멋진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경렴정(景濂亭)이 있었다. 정자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해서(楷書)로 쓴 현판은 퇴계 이황의 글씨고, 초서(草書) 현판은 이황의 제자이자 초서의 대가인 황기로의 글씨라 한다.

지도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서원의 강당인 강학당(講學堂)이 자리하고, 뒤쪽 좌우로 지락재,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가 배치돼 있었다.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통상 사()라 하는데 묘()로 격을 높였다. 제향영역은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의 뒤쪽에 있지만, 이곳은 서쪽에 있는 독특한 사례였다. 그 외 영정각, 정료대와 관세대, 일영대 등이 있었다. 경렴정 아래 죽계천 둑을 따라 걸으며 선비들의 유식(遊息)을 생각해 보았다.

 

영주에 왔으니 자연히 부석사에도 들리게 되었다.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 적힌 일주문을 지나 언덕길 중간에 이르자 당간지주가 보였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전후 작품이라며 보물로 지정돼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 이름 모를 문을 하나 더 들어서자 좌우에 3층 쌍탑이 나왔다. 탑을 둘러보고 가파른 층계 위 봉황산부석사라 적힌 범종루와 안양루를 차례로 지나고 다시 힘들게 계단을 올랐다.

계단이 끝나자 눈앞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석등이 나타나고, 뒤쪽에 고색창연한 무량수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당의 본존불인 소조여래좌상은 특이하게 법당의 측면인 동쪽을 바라보도록 모셔져 있었다. 무량수전 건물(고려시대)을 비롯해 소조여래좌상(고려시대), 석등(통일신라시대)이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었다. 절의 이름이 유래한 부석(浮石)’이 새겨진 큰 바위와 동쪽 둔덕에 서있는 삼층석탑(보물 지정)도 둘러보았다.

절집 앞뜰에 서서 건너편 산야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가자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등성이에 희뿌연 저녁 안개가 내려앉으며 하루해가 또 저문다. 산등성이가 나를 겹겹이 에워싸며 조아린 형국을 보니 이곳이 첩첩산중인 모양이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여행은 계획 이상으로 알찼다. 좋은 날씨가 계속되어 편안하게 여행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마침 단풍철이라 가는 곳마다 특색 있는 단풍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또한 뜻하지 않았던 국향대전과 진기한 에어쇼를 보는 행운도 누렸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일상에 싫증난 기분을 전환하고 활력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생활하다가 기회가 오면 다시 여행에 나설 것이다. 건강이 유지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있는 그날까지...

 

(소수서원)

 

 

(부석사)